“노스탤지어는 피드백의 제곱”은 백남준이 1992년도에 쓴 글의 제목이다. 백남준은 과거를 되돌아보면서 품게 되는 노스탤지어는 단순히 기억을 끄집어내는 행위와 느낌이 아니라, 마치 타인이 우리에게 주는 피드백 못지않은, 혹은 그 피드백보다 훨씬 더 큰 깨달음을 일깨울 수 있다고 믿었다. 그래서 백남준은 유난히 날짜를 이용한 작품을 많이 남겼고, 지난 시대의 유물로 간주되는 예술과 사상을 새롭게 해석하여 미래의 비전을 제시하는 글도 여러 편 썼다.
백남준의 예술 세계를 돌아볼 때 품게 되는 ‘노스탤지어’는 우리 시대의 미디어 아트와 만날 때 훨씬 큰 ‘제곱’의 피드백을 줄 수 있기에 이 구절을 전시의 제목으로 선택하였다.
본 전시는 미래의 비전과 관계된 백남준의 사유에서 출발한다. 백남준은 과학기술의 발전을 예술에 적극적으로 활용했으며 위성이나 컴퓨터를 사용하기 이전부터 미래의 미디어 환경에 대한 통찰이 드러난 작품들을 제작하였다. 그는 일찍이 인간, 기계, 자연을 별개의 영역으로 나누지 않고 어떻게 각 영역 간에 소통이 발생하고 그 소통을 어떻게 제어할 것인지를 탐구하는 사이버네틱스라는 학문에 몰두하였다. 백남준은 사이버네틱스의 경계를 초월한 세계관에 매료되었으며 이를 실현 할 수 있는 도구인 정보통신 기술을 자신의 작업으로 수용하였다. 그가 신디사이저를 이용해 합성한 텔레비전의 이미지, 텔레비전으로 만든 로봇 등은 이러한 사유의 결과물이다.
이번 전시에는 인간, 기계, 자연의 경계를 넘나드는 백남준의 작품들이 소주제별로 구성될 예정이다. MMK 프랑크푸르트 현대미술관 소장품인 <촛불 하나>는 을 비롯한 자연을 소재로 한 백남준의 작품들과 어우러져 하나의 풍경을 이룬다. 독일의 쿤스트할레 브레멘 소장품인 <세 대의 카메라 참여>는 <참여 TV>, <자석 TV>, <닉슨 TV> 등 관객의 참여를 중요시한 텔레비전 작업들과 함께 전시된다.
또한 백남준이 테크니션과 함께 개발하고, 2011년 백남준아트센터에서 복원에 성공한 아날로그 비디오 합성기인 ‘백-아베 비디오 신디사이저’도 처음으로 전시된다. 전시 개막일에는 백남준과 함께 비디오 신디사이저를 개발하고 활용했던 슈야 아베가 직접 신디사이저로 영상을 합성하는 과정을 시연할 예정이다.
1993년 베니스 비엔날레 <유목민인 예술가: 전자초고속도로>전에 선보였던 <마르코 폴로>와 <징기스칸의 복권>은 역사상 동과 서를 가로질렀던 대표적인 인물을 형상화한 로봇 작품들이다. <마르코 폴로>는 자동차와 텔레비전 수상기 등으로 구성된 로봇으로 백남준이 탐구했던 전자적 유목주의, 포스트휴먼의 미래를 생각해보게 하는 중요한 작품이다. 이외에도 을 비롯하여 인간과 기계의 소통을 표상하는 다양한 로봇들이 연극적인 무대를 연출한다. 또한 실제로 움직이는 로봇을 등장시킨 퍼포먼스 영상은 백남준의 상상력의 진면목을 보여줄 것이다.
<징기스칸의 복권>과 <마르코 폴로>는 1993년 베니스 비엔날레 독일관에서 ‘유목민인 예술가’라는 주제 아래 열린 백남준의 <전자초고속도로 – 베니스에서 울란바토르까지>전에 출품되었다. <징기스칸의 복권>은 타고있는 자전거 뒤 쪽에 정보 수송과 관련된 기계들을 싣고 있으며, <마르코 폴로>는 생화로 가득 채운 자동차에 올라타 있다. 백남준은 전시관의 야외 정원에 ‘실크 로드’를 빗댄 ‘스키타이 로드’를 설정하고 그 곳에 역사상 동과 서를 가로 질렀더 인물들을 로봇으로 만들어 세웠다. 서로 다른 문화가 교류하고 공존할 수 있는 가능성을 묻고자 한 것이다.
이 작품은 인체의 수학적 비율에서 우주의 질서와 조화의 원리를 찾았던 르네상스 시대의 원형을 16개의 부위로 분할하고 이를 16대 모니터의 동영상으로 재조합 하면서 인간 중심주의에 대해 질문을 던진다. 테크놀로지를 통해 인간 신체라는 장, 영상기계의 화면이라는 관계망에서 살아가고 있음을 보여주는 것이 백남준의 사이버네틱 예술이며, 이는 백남준에게 사이버네틱스가 관계들에 관한 학문, 혹은 관계 그 자체였기 때문이다.
올라퍼 엘리아슨의 <당신의 모호한 그림자>앞에 선 관객은 여러 개의 이미지로 나누어진 자신의 모습을 발견한다. 엘리아슨은 빛, 물, 안개와 같은 자연현상의 요소를 과학적인 원리와 테크놀로지를 통해 미술 작품으로 승화시킨다. 그는 자신이 재현한 유사자연을 특정 공간에 재현함으로써 관객들에게 문명과 자연의 조우라는 색다른 감동을 경험하게 한다. 관객의 참여가 중요한 모티브로 작용하는 엘리아슨의 작업은 백남준의 작품과 마찬가지로 자연과 과학의 결합, 작품과 관객의 상호교류, 예술과 사회의 소통이라는 공통된 지점을 향하고 있다.
안토니 문타다스의 <파일 룸>은 커뮤니케이션의 권력 중 하나인 ‘검열’이라느 주제를 다룬다. 이 작품은 고대부터 현대까지 세계 각국의 예술과 문화 분야의 검열 사례를 수집하여 검색할 수 있게 하는 데이터베이스이다. 웹사이트를 통해 누구나 검열 사례를 추가할 수 있는 열린 구조이며 미국의 국립검열반대연합 등 관련 기관들과의 협력 하에 계속 확장되고 있는 작품이다. 인터네시라는 가상 공간의 데이터베이스는 서류함 캐비닛 수십 개를 사방으로 쌓아 올려 만든 실제 공간의 형태로 설치된다. 어둡고 위압적이며 닫힌 공간 안에서 컴퓨터 검색으로 검열사례를 살펴 보면서 백남준이 지향했던 쌍방향 소통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 보기를 권한다.
로봇에 대한 백남준의 관심은 1980년대 중반부터 비디오 조각이라 불리는 로봇 연작으로 이어졌다. 이 로봇들은 <로봇 K-456>처럼 인간의 조종에 의해 움직이지는 않지만 구형 텔레비전 수상기가 인간의 신체를 대신하고 TV모니터에서는 비딩 영상이 나온다. 백남준은 히포크라테스, 데카르트, 슈벨트, 당통 등의 역사적 인물에서부터 배우이자 감독인 찰리 채플린, 코미디언 밥 호프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인물들을 로봇으로 재탄생시켰다. 또한 선덕여왕, 율곡 등 한국의 위인들을 로봇으로 만들기도 했다. 백남준의 로봇들은 제목을 통해 정체성을 드러내며 로봇의 신체를 구성하는 다양한 형태의 텔레비전은 인간적인 개성을 표현한다.
삼각대 위에 놓인 촛불의 모습을 카메라가 촬영하고 이를 프로젝터로 벽면에 영사하는 폐쇄회로 시스템으로 구성되는 작품이다. 카메라는 붉은색, 녹색, 청색 빛을 각각 측정하는 세 개의 전하결합소자를 갖고 있으며, 프로젝터 역시 세 가지 색의 브라운관을 통해 각각의 화면을 만드는 구형 삼관식이다. 분리된 빛을 하나로 합쳐 온전한 이미지를 만드는 방식으로 작동하는 이 기계들을 백남준은 이미지를 해체하는 데 사용한다. 색깔 별로 분리된 촛불의 이미지들을 기계 안에서 모아 내보내는 것이 아니라 벽면에 직접 중첩되도록 하는 것이다. 그래서 그 촛불 이미지는 여러 가지 색깔과 모양과 크기의 조합으로 벽에 비춰지게 된다. 주위의 바람이나 관람자의 의해 촛불은 미세하게 움직이고 또 시간이 지나면서 타 내려가기 때문에 벽면의 이미지는 시간에 따라 또 달라진다. 바닥의 장비와 전선을 일부러 숨기지 않고 배치함으로써 벽에서 너울거리는 이미지와의 대비 속에서 일종의 폐쇄 회로로 작용하는 전체 공간을 관찰할 수 있다.
영어 제목인 는 북미 원주민 종족인 ‘hopi’(‘happy’와 글자 수를 맞추기 위해 ‘p’ 하나를 더 추가한 것으로 보임)에 운율을 맞춰 ‘happy’라는 형용사를 붙인 것이다. 모니터 스무 대로 몸체가 되어 있는 인디언이 네온과 전구로 된 머리장식을 두르고 양 손에는 활과 화살을 들고 있는 모습이다. 모니터 화면에서는 3차원 회로도 같은 공간에서 로봇 인간이 거닐고 있고 자동차, 비행기 같은 운송 수단, 위성, 전화기, 컴퓨터, 디스크 등 통신 매체의 이미지가 그래픽화된 형태로 연속해 지나간다. 이 인디언은 스쿠터에 탑승해 있는데 스쿠터의 앞 면은 방패 혹은 가면처럼 채색되어 있다. 호피 인디언 신화에는 방패를 타고 날아다니는 하늘의 신, 서로 다른 세계를 연결하는 메신저 정령의 가면이 등장한다. 백남준은 이렇게 이동과 소통의 관계를 드러내는 아이콘들을 조합하면서 서구 중심의 인류 역사에서 타자화되곤 했던 북미 원주민의 문화를 차용함으로써 진정한 지구화에 대해 묻고 있는 듯 하다.
<이지 라이더>는 1969년에 제작된 데니스 호퍼의 동명 영화에서 따온 것으로, 영화에서 반항적인 두 젊은이가 대안적인 삶을 꿈꾸며 미국을 오토바이로 횡단하는 모습을 담고 있다. 당시 영화는 기존 사회를 부정하고, 히피 문화나 환각제의 사용 등 당대 젊은이들의 모습을 투영하여 엄청난 반향을 일으킨다. 백남준은 1974년 작성한 <후기 산업시대를 위한 미디어 계획>에서 “1960년대의 역사는 우리에게 말하고 있다, 단절된 커뮤니케이션, 이른바 세대 간 혹은 사회 구성원 간 소통의 격차가 그러한 사회적 모체와 가치 체계를 각성시킬 수 있다고”라고 밝히고 있다. 백남준의 로봇 <이지 라이더>는 전자 고속도로라는 광대역 통신을 통해 새로운 사회로 가는 소통 방식을 제안 하고 있다. 16대의 텔레비전 모니터로 이루어진 몸체를 가진 라이더 로봇은 오토바이를 타고 있으며, 몸체에는 각종 자동차 번호판들이 여정을 짐작하게 하는 훈장처럼 붙어 있다. 로봇의 머리에는 현란한 형광등 장식이, 팔에는 색색 전구들이 매달려 있고, 무지개 색을 띤 레이저 디스크 장식들은 사이키델릭하고 자유 분방한 영화 속 주인공을 연상시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