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2월7일부터 6월16일까지 열리는 이번 기획전에서는 예술가들이 특정한 행동을 지속하거나 되풀이 함으로써 어떻게 현실에 대한 비판적 관점이나 의식을 일깨우는지를 조명하고자 한다. 특히 다소 무모해 보이거나 가시적인 성과가 없어 보이는 행동들을 지속함으로써 다분히 사회 비판적인 효과들을 얻는 작품들을 한 자리에 모으고자 했다.
이주노동자들의 삶에 끼어들지만 당장의 문제해결을 위해 싸우는 것이 아니라, 커뮤니티에 참여하여 축제를 열고, 일상의 작고 사소한 사건들에 끊임없이 개입하는 경우(믹스라이스), 이스라엘과 팔레스타인의 경계지역인 ‘그린라인’에서 평온한 퍼포먼스를 진행하는 예술가(프랜시스 알리스), 그리고 아프가니스탄의 노동자 캠프에서 11일 동안 100미터의 영화 트랙을 매일매일 설치하면서 반복적으로 촬영한 영상(멜릭 오하니언), 원주민에게 의미를 모르는 스페인어를 익히게 하고, 이주민들을 금발로 염색하게 하고, 미술전시장의 벽을 기울이게 하여 그 비용을 지불하는 예술가(산티아고 시에라) 등에서 우리는 예술가가 첨예한 정치적 대립구도에서 어느 한 편에 서는 것이 아니라 현실의 흐름에 잠시 편입하는 상황을 보게 된다. 일견 목표가 무엇인지 알기 힘든 이 행위들은 정치적, 경제적으로는 무의미할 수 있지만, 거대담론들을 미시적인 감각으로 분해해서 보여주는 역할을 하며, 이 과정을 통해 이 작업들은 예술적 의미를 획득한다.
다른 한편, 예술가들은 전혀 정치적으로 보이지 않는 상황에서도 위계질서를 적나라하고 과장되게 드러내거나 권력을 은유적으로 보여줌으로써, 정치적인 문제를 제기한다. 이는 위에서 다룬 정치(politics)보다는 정치적인 것(the political)의 문제이다. 그림을 가르치는 텔레비전 교육방송을 패러디해서 그림에 감정을 넣는 법을 가르치는 과정을 보여주거나(김범) 전시 공간의 입구에 해당하는 벽들을 모아서 자신의 작업으로 설치하는 과정(이수성) 등은 예술 제도 내에 무의식적으로 존재하지만 쉽게 깨지지 않는 선입견들을 수면 위로 드러내거나 희화화 한다. 완벽한 식사 예절을 위한 조건을 만드는 과정을 빠른 속도로 편집해서 제도화된 관습의 복잡함과 과장됨을 적나라하게 표출하는 영상(아나 휴스만) 등은 정치적 좌우를 가르는 입장이 아니라 힘의 위계 질서라는 좀더 보편적이지만, 늘 존재하는 대상에 대한 예술가들의 정치적 시선을 보여준다.
명시적으로 정치적인 상황에 대한 무의미해 보이는 침투이건, 보이지 않는 힘을 가시화하는 미시정치이건, 위의 예술가들의 정치성은 감각적 충실함에서 비롯된다는 공통점을 갖고 있다.
양철모, 조지은으로 구성된 듀오 믹스라이스는 이주 노동자들의 문제를 당장 해결하기 위해 격렬히 싸우거나, 안타까움을 과격하게 표출하지 않는다. 이주 노동자의 일상이 우리와 근본적으로 같다고 말하지도 않는다. 자본의 흐름에 따라 이주한 노동자들에게서 순수함을 읽어내려 애쓰지 않으며, 작업의 과정에서 받은 실망도 감추지 않는다. 그러나 실망 후에도 다시 이주라는 문제, 이주와 관련된 수많은 문제들로 돌아온다.
이주라는 현실을 잘 드러낼 수 있는 사진, 영상, 공연, 만화, 벽화 등 다양한 매체들을 실험한다.
김범, <노란 비명>, 2012, 유화, 86x 66cm, 2012, 매일유업㈜ 소장
이 작품은 김범이 반복적으로 다루어온 교육과 매체가 전달하는 정보의 자의성이라는 문제의 연장선상에 있다. 그런데 그 자의성은 현대 미술의 자의성과도 무관하지 않다. 사실 표현주의부터 칸딘스키의 색채 심리학 실험에 이르기까지, 예술가들은 오래 전부터 색채로 정서를 표현하려는 노력을 기울였다. 그러나 현대미술은 그런 노력들을 말과 개념으로 설명하는 것으로 대체한다. 사실 벽에 걸린 이 퍼포먼스의 결과물에서 보듯, 캔버스 안에서 실제로 진행자가 주장하는 감정들을 읽어낼 근거는 없다. 이 작품의 터무니없는 진지함은 한편으로는 현대 미술에서 남발되는 말들을 희화화 하면서도, 다른 한편으로는 이해 받기 힘든 작업을 이해시키기 위해 매달려야 하는 예술가들의 본성에 대한 자조적인 작가의 시선을 엿보게 한다.
프랑스 작가 멜리 오아니앙은 이 영상에서 공간의 연속적 재현과 시간의 불연속적인 재현을 동시에 보여주려고 한다. 영상은 아랍 에미레이트 연방 중 하나인 샤르자의 한 노동자 캠프에서 11일 이상 촬영한 것이다. 첫째 날 작가는 100미터의 트랙을 설치하여 그 위를 통과하면서 약 4분 동안 촬영했다. 다음날에는 트랙을 걷어서 다시 앞으로 100미터를 나아가 재설치 했으며, 이 과정을 11일 동안 반복하면서, 밤과 낮을 구분해서 촬영했다.
예술작품의 소재가 되면서 동시에 예술 기관에 의해 착취당하는 노동자들의 모습은 예술의 이념과 그것을 소비하는 예술 기관들 사이의 현실적 간극을 선명하게 보여준다.
뜻도 모르면서 언어의 한 문장을 따라 익히고, 머리를 금발로 염색하고, 갤러리 벽을 떼어 60도쯤 기울여 버티고 있으면 돈을 받는다. 산티아고 시에라는 터무니없고 조금도 생산적이지 않은 행동을 하도록 사람들을 고용하여 돈을 지불하고, 그 과정을 사진과 비디오에 담는다. 그러나 이 자본의 본성을 거스르는 행동들 때문에 오히려 글로벌 자본주의의 속성이 가장 적나라하게 드러난다. 적은 돈을 벌기 위해 이 무의미한 과정에 참여하는 사람들은 대부분 글로벌 시대의 경제 체제에 적응하지 못하거나 최하위계층으로 남아있는 원주민이나 이주민들이다.
예술은 가장 어처구니없고 비생산적인 행동에도 기꺼이 돈을 지불함으로써 자본으로부터 초연한 척 하지만, 그 행동들이 좀 더 터무니없고 비생산적일수록 몰려드는 관객들에게 소비를 유도한다. 시에라는 글로벌 경제 체제 내의 예술 시스템의 한 가운데에서 그 시스템의 본성에 지나치게 충실한 행동으로 그 모순적 상황을 꼬집는다.
“그린라인”은 1949년 이스라엘과 인접국가들 사이의 휴전협정으로 그어진 잠정적 경계선으로, 이 이름은 당시 논의가 진행될 때 지도 위에 녹색 잉크를 사용해 표시한 데에서 비롯되었다. 작가는 녹색 페인트가 흘러나오는 통을 들고 이 경계선을 따라 이틀 동안 계속해서 걷고 또 걷는다. 이 퍼포먼스를 계기로 작가와 인터뷰를 하게 된 11명의 인물들은 그린라인에 대해 저마다 다른 시선을 드러낸다. 작가는 엄청난 긴장감이 감도는 국제적 분쟁 지역에서 조용하고 시적인 자신의 몸짓이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는지에 대해 묻는다.
영상설치 <내게 새로운 기회가 주어진다면 나는 그것을 거부한다>는 일상에서는 나름의 기능을 갖고 있는 사물들을 영상으로 촬영한 후, 마치 자연의 힘에 의해 마모되어 “보여지는” 기능만 남은 수석처럼, 그 사물의 기능을 없앤 것이다. 그리고 사물의 원래 자리에서 촬영한 24개의 영상은 그 사물이 갖고 있던 기능의 흔적들을 보여줌으로써, 현재의 “보여지기만 하는”상태를 더욱 도드라지게 한다.
사물들이 공간에 배치된 방식과 물리적인 속성을 통해 전체의 이야기를 만들어낸다. 사물이 놓인 공간과 무게 같은 단순한 속성들 때문에, 우리는 이 사물들에서 법, 제도, 관습, 권력 등의 커다란 힘들의 존재를 읽어내게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