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번 특별전에서는 2012 백남준아트센터 국제예술상 수상 작가전인 <더그 에이트킨: 전기 지구>를 기념하여, 백남준의 퍼포먼스를 재조명한다. 그의 퍼포먼스를 기록한 비디오와 자료부터 길거리의 해프닝, 비디오를 찍기 위해 수행한 퍼포먼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작업들이 더그 에이트킨과 같이 신체와 움직임에 주목한 오늘의 비디오 아티스트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짐작해보게 하는 자리가 될 것이다.
백남준은 새로운 예술 매체를 발견해낸 미디어 아티스트이기 이전에 탁월한 공연예술가였다. 음악에서 출발해서 시각예술로 영역을 넓혀나간 백남준에게 퍼포먼스는 전통적인 예술 장르를 뛰어넘어 관객과 얼굴을 마주할 수 있는 자유로움의 장(場)이었다. 백남준은 퍼포먼스를 통해 악기를 부수고 몸을 드러내는 파격을 수행했을 뿐만 아니라, 인간과 기술의 이음새를 찾는 철학적 성찰을 보여주었다.
이번 특별전에서는 2012 백남준아트센터 국제예술상 수상 작가전인 <더그 에이트킨: 전기 지구>를 기념하여, 백남준의 퍼포먼스를 재조명한다. 그의 퍼포먼스를 기록한 비디오와 자료부터 길거리의 해프닝, 비디오를 찍기 위해 수행한 퍼포먼스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작업들이 더그 에이트킨과 같이 신체와 움직임에 주목한 오늘의 비디오 아티스트들에게 어떤 영향을 미쳤는지 짐작해보게 하는 자리가 될 것이다.
Catherine Ikam, Paik Plays Piano Pieces (2012), video, color-sound, 12min 32sec
비디오 설치(조각) 작가이자 백남준의 동료인 카트린 이캄은 백남준이 자신의 주요 퍼포먼스를 스튜디오에서 재연하는 영상들로 다큐멘터리를 만들었다. 퍼포먼스의 특성상 공연 현장의 기록에는 수많은 변수와 잡음이 들어가기 때문에 공연자의 동작을 완벽하게 보기 힘든 반면, 이 영상에서는 백남준의 동작 하나 하나를 볼 수 있다. 국내에 처음으로 공개되는 이 영상은 백남준이 녹색의 크로마 키 화면 앞에서 하는 퍼포먼스 장면을 담고 있어서, 이제는 떠난 그가 합성을 통해 새로운 시공간의 작품 속으로 들어갈 수 있는 가능성도 열어두고 있다.
II. 백남준의 주요 퍼포먼스
백남준은 같은 제목의 퍼포먼스라도 매번 다른 형식으로 공연했고 여러가지 퍼포먼스를 뒤섞기도 했기 때문에 세부내용은 공연마다 달랐다. 여기서는 초연을 중심으로 소개하되, 공연이 크게 달라진 경우에는 그 변화의 내용을 설명했다.
Hommage à John Cage, 1959
존 케이지를 만나 새로운 예술에 눈을 뜬 백남준은 케이지에게 바치는 소리 콜라주와 퍼포먼스를 만들었다. 릴 테이프에 클래식 음악부터 일상의 소음까지 녹음을 해서 편집한 후, 자신이 조작하고 변형한 이른바 ‘장치된 피아노’와 함께 공연을 했다. 클래식 음악으로는 베토벤의 교향곡 5번, 독일가곡, 라흐마니노프의 피아노 협주곡 제2번 등이 녹음되었고, 비음악적인 소리로는 비명, 유리 깨지는 소리, 금속 상자 속의 돌 소리, 수탉 울음, 복권발표와 뉴스, 그리고 장치된 피아노의 소리도 들을 수 있다.
Étude for Pianoforte, 1960
동료 예술가인 마리 바우어마이스터의 작업실에서 열린 이 공연에서, 백남준은 쇼팽의 피아노곡을 치다가 울면서 뛰어다니고, 피아노를 부수고 쓰러뜨리는 퍼포먼스를 하였다. 그리고는 그는 가위를 들고 달려가 객석에 있던 존 케이지의 재킷을 들어올리고 셔츠 일부와 넥타이를 잘라내었다. 그리고는 케이지와 데이비드 튜더에게 샴푸를 부어 머리를 감긴 후 어디론가 달려나가 버린다. 곧 이어 백남준은 어딘가에서 “퍼포먼스는 끝났습니다”라고 전화를 걸었고, 무대 위에는 시동이 걸린 오토바이 한 대가 운전자 없이 남아 있었다.
Simple, 1961
백남준은 조용히 무대 위로 올라가 객석과 천장을 향해 콩을 던졌다. 그리고는 두루마리 종이로 천천히 얼굴을 가렸다 드러냈다 하면서 눈물을 흘렸고, 종이를 얼굴에 대어 눈물에 젖게 했다. 백남준이 갑자기 소리를 지르며 종이를 집어던지고 테이프 레코더를 작동시키면 여자의 외침, 라디오 뉴스, 아이들의 소란, 클래식 음악, 전자 음향 등이 15초가량 흘러나왔다. 그는 얼굴, 옷, 발끝까지 면도 크림을 바르고, 그 위에 밀가루를 붓고 욕조에 뛰어든 후, 피아노로 다가가 머리로 건반을 연주했다.
Zen for Head, 1961
칼 하인츠 슈톡하우젠이 기획한 퍼포먼스 <오리기날레>(독일어로 “괴짜들”이라는 뜻)에서 백남준은 처음으로 <머리를 위한 선>을 공연하였다. 머리카락에 붓처럼 잉크를 묻혀 바닥에 놓인 종이 위에 천천히 선을 그어서 신체의 미세한 움직임의 흔적들까지 남겨놓았다. 백남준의 “선(禪)” 시리즈의 첫 작품으로 파격적인 행위의 내용이 조용한 몸짓과 강렬한 대비를 이루는 작품이다.
One for Violin Solo, 1962
바이올린을 천천히 들어올린 후 한 순간에 “쾅” 내리쳐서 부수는 퍼포먼스이다. 지시문에 따르면 “5분간 바이올린을 들어올린다”고 되어 있다. 흔히 관습적인 클래식 음악의 종언을 고하는 행위로 해석되며, 실제로 공연 도중 뒤셀도르프 관현악단의 바이올린 주자 한 명이 “그 바이올린을 살려달라”고 고함을 치는 사건도 있었다. 바이올린을 숨막히도록 느리게 들어올리는 동작과 한 순간에 악기를 부수어 버리는 갑작스러운 행동이 대비를 이루어 충격을 유도하는 초기 퍼포먼스의 대표적인 작품이다.
Serenade for Alison, 1962
백남준이 “아름다운 여성 화가”라고 불렀던 앨리슨 놀즈는 암스테르담의 한 갤러리에서 색동 한복 천으로 된 헐렁한 드레스를 입고 테이블 위에 올라섰다.백남준을 비롯한 남성들에 둘러싸인 놀즈는 스트립 쇼를 하듯 아홉 장의 팬티를 하나씩 벗었다. 원래 백남준의 스코어(퍼포먼스 지시문)에 따르면 “팬티 사이로 관객을 보고”, “속물의 머리에 뒤집어 씌우고” 심지어 “피가 묻은 팬티를 벗어 최악의 음악 평론가의 입에 물리고”, 마지막에 “아무 것도 입지 않은 것을 보여주라”고 되어있다. 그러나 놀즈는 스코어를 그대로 따르지 않고 변형해서, 목에 라디오를 걸고 객석으로 팬티를 집어 던지다, 관객들을 갤러리 밖으로 몰고 나갔다.
Robot Opera, 1964
첼리스트 샬롯 무어먼이 기획한 “제2회 뉴욕 아방가르드 페스티벌”에서 처음으로 소개된 작품으로, 리모트 컨트롤로 작동하는 로봇이 걸어다니고, 무어먼이 첼로를 연주하는 퍼포먼스이다. 부서질 듯 엉성하게 생긴 <로봇 K-456>은 백남준의 조종에 따라 아슬아슬하게 길거리를 걸어 다니면서 녹음된 케네디 대통령의 연설을 내보내고, 배설하듯 콩을 흘렸고, 가슴은 숨을 쉬는 것처럼 부풀어올랐다. 1982년 뉴욕 휘트니 미술관 개인전에서 백남준은 이 로봇이 교통사고를 당하는 상황을 연출하고, 그에게 사망선고를 내리는 마지막 퍼포먼스를 하면서 “21세기 최초의 참사”라고 명명하였다.
26’1.1499” for String Player by John Cage (1965)
백남준과 함께 첼리스트 샬롯 무어먼이 존 케이지가 1955년 작곡한 악보를 재해석한 공연으로, 초연에서 윗옷을 벗은 백남준의 등에 현을 설치해서 첼로처럼 연주한 장면으로 유명하다. 케이지의 원곡은 몇 가지 물건들을 늘어놓고 하나씩 소리를 내면서 첼로를 연주하는 소리 실험이었는데, 백남준과 무어먼은 훨씬 잡다한 물건들을 사용해 소리를 만들고, 그 소리들을 사회적 의미로까지 확장시킨다. 1973년 공연에서는 무어먼이 화약총을 쏘고, 유리병을 두드리고, 풍선을 이로 터트리고, 콜라를 마시고 트림을 하기도 한다. 그리고는 첼로 대신 포탄을 끌어안고 그 몸통을 손과 톱으로 긁고, 텍스트를 읽거나 비명을 지르다 급기야 백악관에 전화를 걸어 대통령을 바꿔 달라고 하기도 했다.
Opéra Sextronique, 1966
샬롯 무어먼이 옷을 벗으며 첼로를 연주하는 공연으로 1966년 독일 아헨에서는 무사히 초연되었으나, 1967년 뉴욕 공연에서는 뉴욕 경찰이 무어먼을 연행하면서 큰 소동이 일어났고, 결국 이 소동이 뉴욕주(州)의 공연관련 법을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자세한 내용은 1층의 <<부드러운 교란>>전에 전시된 작품과 자료를 참고하세요.
TV Bra for Living Sculpture, 1969
는 두 개의 플렉시글라스 상자 안에 각각 작은 TV를 넣은 후, 투명 테이프로 상체에 부착하는 작품이며, 동시에 그것을 착용하고 첼로를 연주하는 공연의 제목이기도 하다. 모니터에서는 현재 방송되는 텔레비전, 폐쇄회로 카메라의 영상 혹은 녹화된 비디오 테이프의 영상 등이 나오며, 때로는 첼로의 소리를 녹음해서 다시 그 소리가 영상에 노이즈를 만들기도 했다. 백남준은 이 작품이 “전자와 기술을 인간화” 하는 것이라고 말한 바 있다. TV 첼로와 비디오테이프를 위한 협주곡, 1971 Concerto for TV Cello and Videotapes, 1971 크기가 다른 여러 대의 TV로 첼로 모양을 만들고, 그 위에 현을 매달아 만든 를 연주하는 퍼포먼스이다. 퍼포먼스에 사용되는 TV 속의 영상은 대체로 3채널로, 공연이 이루어지는 지역의 TV 방송, 녹화된 비디오 및 합성 영상, 그리고 공연 장면을 폐쇄회로 카메라로 찍은 실시간 피드로 구성된다. 무어먼이 이 악기를 연주하는 소리까지 더해져서 이 협주곡 연주는 전자예술의 통신, 저장, 편집, 인터렉션의 기능과 즉흥성까지 포괄하는 공연이었다.
III. 백남준의 거리 해프닝
백남준은 퍼포먼스 무대에 섰을 뿐만 아니라, 거리에서 해프닝에 가까운 공연을 벌여서 일상의 공간으로 들어가거나 예기치 못한 상황들을 작품 안으로 끌어들였다. 강한 집중력으로 카리스마 넘치던 무대 위의 모습과는 달리, 길 위의 백남준은 좀더 여유 있고 장난기 어린 모습으로 시민들에게 다가갔다. 1994년의 <서울/뉴욕맥스 퍼포먼스>의 워싱턴 광장 공원에서 벌인 굿판이나 하버드 광장에서 바이올린을 부수는 해프닝을 벌이는 장면은 노년에 접어든 백남준의 유머와 여유를 보여준다.
IV. 퍼포먼스-비디오
백남준은 퍼포먼스 장면들을 촬영하여 이후에 비디오 작품의 재료로 수없이 많이 사용했지만, 영상을 만들기 위해 퍼포먼스를 한 경우도 있었다. 그의 뉴욕 작업실을 옮겨온 “메모라빌리아”에 전시되는 흑백영상 <손과 얼굴>(1965), <시네마 메타피지크>(1967-1972)는 영상을 찍기 위해 그가 직접 카메라 앞에서 퍼포먼스를 한 작업들로, 퍼포먼스와 비디오 아트가 갖는 밀접한 관계를 보여주는 동시에, 퍼포먼스를 기록한 영상과 비디오 아트를 어떻게 구분할 수 있는가라는 물음을 던지게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