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남준아트센터- 백남준
학생: 6,000원
기명절지 4쪽
1-1. 약야홍장(若耶紅粧: 약야계의 붉은 연꽃), 장승업(張承業), 지본담채, 131.2×33.7cm
1-2. 서안괘어(書案掛魚: 책상에 걸린 물고기), 장승업(張承業), 지본담채, 131.2×33.7cm
1-3. 향로수선(香爐水仙: 향로와 수선화), 장승업(張承業), 지본담채, 131.2×33.7cm
1-4. 고동추실(古銅秋實: 고동기와 가을 열매), 장승업(張承業), 지본담채, 131.2×33.7cm
1-5. 백남준, <비디오 샹들리에 1번>, 1989, TV 모니터, 색전구, 흑백, 무성, 가변크기
장승업의 <기명절지도>와 백남준의 설치 작품 <비디오 샹들리에 1번>을 함께 배열했다. 장승업의 <기명절지도>는 10폭이지만 이번 전시에는 4폭이 전시된다. 연꽃, 책상에 걸린 물고기, 향로와 수선화, 오래된 동 그릇과 가을 열매들이 화폭의 소재들이다. 연은 군자를 상징하고 연뿌리는 자손의 번창을 기원하기 위함이다. 두 마리의 물고기는 경사스러운 일을 바라는 뜻을 담고 있고 수선화(水仙花)는 이름자대로 물에 사는 신선 같은 꽃이니, 신선처럼 향기롭게 살기를 바라는 마음일 것이다. 감과 밤 같은 가을 열매들은 일이 잘 풀리고 자손이 번창하길 바라는 소재들이다.
샹들리에는 고대 그리스 시대부터 사용했다고 전해지는데, 처음에 촛불을 넣어 조명의 역할로 사용하던 것이 르네상스 시기 이후부터 조명뿐 아니라 건축 내부의 장식 기능까지 하게 되었다. 즉 샹들리에는 부유한 상류 계층의 전유물이다. 백남준은 1989년 <비디오 샹들리에 1번>을 제작하며 샹들리에에 여러 대의 소형 T V를 매달았다. 부유함의 상징인 샹들리에에 대중들의 정보의 창인 소형 TV와 전구를 매단 것이 특이하다. 이 두 작품은 사람이 누릴 수 있는 복(福)에 대한 옛 거장과 현대 거장의 시각을 잘 보여준다.
2-1. 촉잔도권(蜀棧圖卷), 심사정(沈師正), 지본담채, 58.0×818.0cm / 부분
2-2. 백남준, <코끼리 마차>, 1999-2001, 혼합매체, 가변크기
현재 심사정이 62세에 그린 <촉잔도권>은 국보급의 대형 두루마리 그림이다. 현재 중국 사천성과 광서성에 해당하는 촉(蜀)나라로 가는 길은 매우 험난하여 시인 이백이 ‘촉으로 향하는 길은 하늘을 오르기보다 힘들다’고 말했을 정도다. 화면 오른쪽부터 왼쪽으로 따라가면서 바라보면 험준한 산길과 굽이굽이 물길을 만드는 깊은 계곡이 끝날 줄 모르고 이어진다. 이 그림을 바라보면 인생의 역경이 절로 떠오른다. 그림이 끝나는 왼쪽 부분에서 평화로운 강 하구에는 돛을 단 배들이 순풍을 맞아 어딘가로 유유히 흘러간다. 초반의 역경을 딛고 끝까지 살아간 사람들에게 찾아오는 말년의 여유를 상기시킨다.
백남준의 <코끼리 마차>는 정보통신에 대한 역사를 보여주는 것 같다. 과거에 정보를 교환하려면 편지를 주고 받거나 직접 먼 거리를 이동해 만나는 수밖에 없었다. 상서로운 동물로 여겨지던 코끼리는 먼 옛날부터 이동수단으로 사용되었다. 이 작품에서 백남준은 코끼리와 TV라는 소통의 매개체를 연결시켰다. 코끼리 위에 앉은 부처님은 노란 우산을 쓰고 행차 중이며 마차에는 TV가 가득 실려 있다. 정보는 한때 특권층의 전유물이었으나 현재는 모든 사람이 TV 등 다양한 미디어를 통해 쉽게 정보를 공유한다. 현재 심사정이 <촉잔도권>의 길을 통해 모든 순간에 정성을 다 하는 진지한 자세로 삶의 의미를 깨닫게 했다면, 백남준은 길을 따라 이동하는 <코끼리 마차>를 통해 정보가 공유, 전파되며 빠르게 변화하는 이 시대에 정보통신과 관련된 기술을 인간화하려는 이상적인 방법을 모색하였다.
3-1. 백남준, <달에 사는 토끼>, 1996, TV 모니터, 토기 조각상, 가변크기
3-2. 오동폐월(梧桐吠月: 오동나무 아래에서 개가 달 보고 짖다), 장승업(張承業),
견본담채, 145.1×41.4cm
“달은 인류 최초의 텔레비전이다.” 백남준이 남긴 유명한 말이다. 이 말을 토대로 백남준은 여러 작품들을 제작했는데 <달에 사는 토끼>도 그 중 하나이다. 나무로 만든 토끼는 TV를 비춘 달을 응시하고 있다. 이제 우리는 달에 토끼가 살고 있지 않다는 사실을 안다. 그래도 여전히 달 속의 토끼를 상상한다. 과학적 사실과 시적 상상력, 이 둘의 우월관계에 대해서 말하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다. 과학기술이 만든 TV라는 틀을 채우는 내용은 우리의 상상력이기 때문이다.
우리 조상들은 달을 많이 그렸다. 오원 장승업의 <오동폐월> 역시 그 중 하나이다. 보름달이 뜬 깊은 밤에 국화가 달빛을 받아 노란 빛을 더한다. 한 잎 두 잎 떨어지는 오동 잎에 다가올 겨울이 두려운 것일까? 이 국화꽃이야말로 이 해 핀 마지막 꽃이라는 것을 알아서일까? 보름달 뜬 밤에 개는 고개를 돌려 국화꽃을 바라본다. 오원이 자신의 심정을 지나가는 한 마리 개에게 의탁했는지도 모른다. 시적 정취가 아름답다. 이 두 대가들은 달이라는 소재를 통해 우리의 상상력과 시적 감수성이 과거와 현재로 단절된 것이 아니라 앞으로 인류가 존재하는 한 계속될 것이라고 말하는 듯 하다.
4-1. 백남준, <머리를 위한 선>, 연도미상, 종이에 잉크, 157ⅹ100cm
4-2. 수로예구(壽老曳龜: 수노인이 거북을 끌다), 김명국(金明國), 지본수묵, 100.5×52.7cm
한 시대를 풍미하고 이끌었던 규칙과 질서의 엄밀함은 시간이 지나면서 차츰 의미를 잃기도 한다. 탄탄한 힘을 잃은 규칙과 질서라 해도 누군가 쉽게 이를 대체할 것을 만들어 낼 수 있는 것은 아니다. 변화란 늘 아무도 눈치채지 못한 사이에 소리 없이 다가온다. 우리가 변화를 인식했을 때 그것은 이미 변화가 일어나버린 이후이다. 하지만 예민하고 직관력 있는 소수의 예술가들은 이러한 변화를 먼저 감지하고, 그 변화의 의지를 파격적이며 일탈적인 작품을 통해 제시한다. 예를 들어 현대음악 작곡가인 존 케이지는 4분 33초 동안 피아노 앞에 앉은 연주자가 아무 것도 연주하지 않고 이를 바라보는 관객들의 웅성거림, 자동차의 경적소리 등과 같은 소음을 음악으로 표현한, 음악에 대한 개념을 뒤바꾼 전위적 작품 <4분 33초>를 발표했다. 케이지의 선구적 시도는 많은 이들의 의식을 변화시켰다. 백남준도 케이지의 영향을 받았는데, 백남준은 자신의 머리에 잉크를 적셔 종이에 선을 그어 내려간 <머리를 위한 선(禪)>이라는 퍼포먼스를 펼치기도 했다. 이 작품은 일종의 참선(參禪) 수행처럼 관객들에게 공간과 시간을 직시하게 하는 시도였다. 분방하고 개성 있는 필치로 효종과 인조 임금 시기에 활동했던 연담 김명국은 ‘취옹(醉翁)’이라는 호가 있을 정도로 술을 매우 좋아했고 격식이나 법칙에 얽매이지 않았다. 김명국이 그린 <철괴>라는 주인공은 도교의 팔선인(八仙人) 중 한 명이다. 작품에 보이는 대범한 필법이 예사롭지 않다. <수로예구>의 수 노인은 장수를 상징하는 신선으로 거북을 끌고 다닌다. 연한 묵으로 단숨에 그린 화법에서 파격의 경지를 느낄 수 있다.
5-1. 호계삼소(虎溪三笑: 호계의 세 사람 웃음소리), 최북(崔北), 견본담채, 29.7×21.0cm
5-2. 백남준, <슈베르트>, 2001, 1-채널 비디오 조각, 108×183×61cm
5-3. 백남준, <율곡>, 2001, 구형 텔레비전, 구형 라디오, 165×189×48cm
5-4. 백남준, <찰리 채플린>, 2001, 구형 텔레비전, 구형 라디오, 전구, 185×152×56cm
‘호계삼소(虎溪三笑)’라는 유명한 고사를 형상화한 그림이다. 중국 동진 시대 혜원 스님은 손님이 오면 으레 배웅을 하곤 하는데 ‘호계’라는 계곡을 넘지 않았다고 한다. 어느 날 도연명과 도사 육수정이 찾아왔고 이 귀한 손님들이 떠날 때도 배웅을 했는데 이야기에 열중하다가 호계를 넘는 것을 잊었다고 한다. 세 사람은 호랑이 울부짖는 소리에 놀랐고, 그제서야 호계를 넘었음을 알고 모두 웃었다고 한다. 유불선이 하나되어 회통된 순간을 뜻한다.
백남준의 로봇 작품들 중에 <슈베르트>와 <율곡>, <찰리 채플린>이 있다. <슈베르트>는 빨간 축음기 스피커를 모자처럼 쓰고 아홉 개의 진공 라디오로 신체 전반부가 구성되어 있는데 이러한 모습은 이 로봇이 음악가임을 상기시킨다. <율곡>은 모서리가 둥근 라디오로 표현한 두 다리에서 선비의 정좌 자세를 연상시킨다. 두 팔에 세 가닥으로 뻗은 안테나는 선비의 도포를 연상시킨다. 희극배우 찰리 채플린을 형상화한 로봇 <찰리 채플린>은 고풍스러운 TV 모니터와 전구로 구성된, 무성영화 시대의 향수를 자아내는 작품이다. 슈베르트, 율곡, 찰리 채플린은 모두 다른 시대와 공간에서 살았지만 여전히 우리와 함께 현재를 살고 있기도 하다.
6-1. 관수삼매(觀水三昧: 물을 보며 삼매에 들다), 최북, 견본담채, 31.6×11.0cm
6-2. 백남준, <TV부처>, 2001 (1974), CCTV카메라, 모니터, 부처상, 가변설치
최북의 <관수삼매>에서 가부좌한 스님이 물가를 바라본다. 앞에 놓인 작은 종이조각은 경전의 부분을 따온 문구인 듯하다. 스님의 의식이 본인 내면에 있는 참된 자아에 완전히 이르지 못했는지 아직 물가나 경전 내용에 집착하는지도 모르겠다. 깨달음은 어려운 주제이다. 그것은 아마도 나와 외부대상이 둘이 아님을 직관할 때 홀연히 얻게 되는 귀한 성찰일 것이다.
백남준의 <TV 부처>에서 부처는 TV에 나오는 자신의 모습을 응시하고 있다. 관객의 움직임에 따라 TV 모니터에 관객의 모습이 나오기도 한다. 자신이 누구인지 스스로를 응시하고 집중할 때 깨달음이 오듯, 이 작품은 서구 철학계와 지식인들에게 깊은 영향을 준 백남준의 대표작으로 언급된다. 옛 그림과 현대 거장의 작품에서 우리의 인식이 성찰의 단계를 거쳐 성숙해가는 모습을 잘 볼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