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남준아트센터의 사진컬렉션은 음악을 공부하던 백남준이 본격적으로 미술계에 진입하던 1950년대 후반에서 60년대 초반 유럽 아방가르드 예술계에서 벌였던 전위적이고 실험적인 퍼포먼스를 찍은 사진들로 집중 구성되어 있다. 1963년 독일에서 열린 백남준의 첫 개인전의 면면을 담은 사진들 또한 소장품의 주요 항목이다. 백남준의 예술 정신은 이 초기 활동에 단단히 뿌리를 내린 채 자양분이 되어 미디어 아트라는 새로운 영토를 일궜다. 그렇기 때문에 이 사진들은 역사적 사건의 기록이면서 동시에 우리에게 백남준의 근원을 되새기게 하는 중요한 컬렉션이다. 그리고 소장품의 이러한 역할은 때로 우연히 포착된 한 순간으로써 그 순간의 바깥을 탐색하고 상상하는 즐거움을 건네는 사진 본연의 특성에 힘입는다. 이 연재에서는 백남준아트센터의 사진 소장품을 3회에 걸쳐 소개한다.
1. 거칠 것 없는 열기, 그 현장 속으로
[사진 1]만프레드 레베, 《뒤셀도르프 갤러리 22에서 프랑스와 데솔로제르 리허설 중, 존 케이지, 프랑스와 데솔로제르, 실바노 부소티, 하인츠 클라우스 메츠거, 베르나르 슐츠, 장 피에르 빌헬름》, 1958, 20.3×25.4cm, 흑백 사진
1956년 독일로 건너간 백남준은 플럭서스라는 미술사적 움직임이 뜨겁게 일어나던 한복판에서 일군의 작가들과 활발하게 교류하며 창작 활동을 했다. 이들이 참여한 여러 ‘공연’은 전통적인 미술관이나 극장이 아니라 음악, 연극, 미술의 경계를 허물 수 있는 장소에서 일어났는데 그 중 한 곳이 뒤셀도르프의 갤러리 22였다. 라인란트 지역 예술 후원자였던 장 피에르 빌헬름이 1957년에 문을 연 이 갤러리는 아방가르드 예술가들의 콘서트와 퍼포먼스를 열어 당시 뒤셀도르프 미술계에 큰 반향을 일으켰다. 1958년에는 존 케이지의 《음악 산책》이 공연되었는데, 오선을 비롯해 다양한 각도의 선들이 그려진 투명도와 수많은 점들이 찍힌 종이들을 가지고 일종의 악보를 구성하여 라디오, 목소리, 피아노 등으로 연주하는 작품이다. 같은 해 실바노 부소티도 자작곡들의 공식적인 첫 공연을 이 곳에서 열었다. [사진 1]은 그 중 한 곡인 옹드 마르트노 솔로를 위한 《브레브(Brève)》의 리허설 장면이다. 옹드 마르트노는 모리스 마르트노가 1928년 개발한 전자 건반으로 화음은 불가하지만 여러 개의 주파수 발진기의 울림을 이용하여 단선율로 여러 음을 만들어내는 악기이다. 사진 속 부소티와 함께 악기에 앉은 사람은 옹드 연주자인 프랑스와 데솔로제르이다. 그 뒤에서 악기를 내려다 보고 있는 존 케이지, 그리고 사진 맨 오른쪽에 장 피에르 빌헬름이 있다.
백남준의 첫 데뷔 무대도 갤러리 22였다. 1959년 《존 케이지에 대한 경의》를 이곳에서 공식적으로 초연한 것이다. 고전 음악부터 일상 소음까지를 다양하게 녹음하여 콜라주한 소리들이 테이프에서 흘러나오는 가운데 공연장에 놓인 ‘장치된’ 피아노를 연주하고 부수고 바닥에 넘어뜨리는 내용이다. [사진 2]는 당시 갤러리에 모인 사람들의 모습으로 백남준 옆에 서 있는 사람은 작곡가 윤이상이다. 1958년 다름슈타트 국제 현대음악 하기 강좌에서 케이지를 만나 새로운 예술에 눈을 뜨게 된 백남준은 그로부터 받은 영향, 그를 뛰어넘겠다는 의지를 이 작품에 녹였다. 1992년 케이지가 죽자 백남준은 추모 글에서 케이지와의 만남 이전을 기원전 (B.C. “Before Cage” 케이지 이전), 케이지가 죽은 다음을 기원후(A.D. “After Death” 죽음 이후)라고 할 만큼 자신의 인생에 케이지가 끼친 지대한 영향을 표현하기도 했다.
[사진 2]
만프레드 레베, 《뒤셀도르프 갤러리 22에서 백남준의 ‘존 케이지에게 보내는 경의’ 퍼포먼스 후, 윤이상, 백남준》, 1959, 20.3×25.4cm, 흑백 사진
[사진 3]
만프레드 레베, 《백남준의 쾰른 스튜디오에서 ‘존 케이지에게 보내는 경의를 준비하는 백남준, 한스 헬름스, 실바노 부소티》, 1959, 20.3×25.4cm, 흑백 사진
뒤셀도르프에서의 초연에 앞서 《존 케이지에 대한 경의》는 쾰른의 백남준 스튜디오에서 동료 작가들이 모인 가운데 프리뷰처럼 선보인 바 있다. [사진 3]은 이 때의 모습으로 장치된 피아노 앞에 한스 G. 헬름스, 뒤에 백남준과 부소티이다. 그리고 이듬해 쾰른에 있는 마리 바우어마이스터의 아틀리에에서도 다시 공연되었다. 바우어마이스터는 후에 백남준과 가까운 동료가 되어 1970년대 초반까지 서신을 주고 받으며 예술 세계를 함께 나눴다. 그녀의 쾰른 아틀리에는 플럭서스 작가들의 전위적 퍼포먼스가 초연되고 실험되는 본거지였다. 1960년 6월 이곳에서 당시 쾰른의 국제현대음악학회가 조직하는 연례음악축제(IGNM, Internationale Gesellschaft für Neue Musik)의 보수성에 반기를 든 《반-축제(Contre-Festival zum Kölner IGNM-Fest)》가 기획되었다. IGNM에 참여한 일부 작가들과 그 축제의 심사위원단이 탈락시킨 작가들이 모여 낭독, 해프닝, 음악 공연을 벌였다. 여기에서 백남준의 《존 케이지에 대한 경의》가 다시 선보였다.
[사진 4]
만프레드 레베, 《뒤셀도르프 카머슈필레에서 백남준, ‘음악에서의 네오 다다’, 공연 중》, 1962, 20.3×25.4cm, 흑백 사진
백남준의 초기 주요 퍼포먼스 작업이 초연된 자리 중에는 1962년 뒤셀도르프의 카머슈필레 극장에서 열린 《음악에서의 네오 다다》가 있다. 플럭서스 이벤트인 이 행사는 조지 마치우나스와 백남준이 함께 기획하였으며 칼하인츠 카스파리, 벤자민 패터슨, 토마스 슈미트, 볼프 포스텔 등이 참여했고 장 피에르 빌헬름이 개막사를 했다. [사진 4]는 현장에서 백남준을 비롯한 여러 작가들이 동시에 퍼포먼스를 벌이고 있는 모습이다. 백남준은 《음악에서의 네오 다다》에서 《환상곡 풍의 소나타》와 《바이올린 솔로를 위한 하나》를 처음 선보였다. 《환상곡 풍의 소나타》는 ‘월광 소나타’로 알려진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14번을 연주하면서 스트립쇼처럼 옷을 벗는 행위를 번갈아 하는 퍼포먼스이다. 베토벤이 직접 붙인 제목을 차용하되 백남준은 ‘환상’에 성적인 은유를 더해 이중적 의미로 사용했다. 《바이올린 솔로를 위한 하나》는 천천히 부드럽게 바이올린을 수직으로 치켜들었다가 일순간 탁자로 내리쳐서 산산조각 내는 퍼포먼스이다. 당시 청중석에는 뒤셀도르프 시립오케스트라의 제1바이올린 주자가 있었다고 한다. 공연 도중 백남준이 바이올린을 부수려 한다는 걸 알고는 이 연주자가 “바이올린을 살려달라” 외쳤고, 요셉 보이스와 콘라트 클라펙이 “공연을 방해하지 말라” 소리치며 그를 제지해 문밖으로 내쫓았다. 이 공연은 「청중을 내쫓은 콘서트」라는 제목의 기사로 신문에 실리기도 했다. 이 일화에 대해 적으며 백남준은 그 바이올린 연주자가 자신의 콘서트에 왜 왔는지 지금도 이해할 수 없다며 특유의 넉살 섞인 분석을 내놓기도 했다. 이 밖에 《플라토닉 연습곡 5번 “부드럽게 웃어라”》와 《미국 바가텔》도 이날 백남준의 레퍼토리에 이름을 올렸다.
[사진 5]
만프레드 레베, 《뒤셀도르프 예술아카데미의 “페스텀 플럭소럼 플럭서스: 음악과 반음악, 기악 극장” 행사에서 벤자민 패터슨의 ‘페이퍼 피스’ 공연 중》, 1963, 20.3×25.4cm, 흑백 사진
《음악에서의 네오 다다》 뒤풀이 자리에서 보이스는 백남준에게 자신이 교수로 재직 중이던 뒤셀도르프 예술아카데미에서의 전시를 제안했고, 백남준은 자신의 전시 대신 플럭서스 이벤트 개최에 대한 아이디어를 내게 된다. 마치우나스가 기획하여 비스바덴, 코펜하겐, 파리를 순회하며 진행하고 있던 플럭서스 투어와 백남준의 제안이 결합하여, 마침내 1963년 2월 《페스텀 플럭소럼 플럭서스: 음악과 반음악, 기악 극장》이라는 제목의 플럭서스 축제가 열렸다. 첫째 날 무대는 커다란 종이로 된 막으로 가려져 있고 그 뒤에서 장 피에르 빌헬름의 개막사가 있은 후, 두 명의 공연자가 커다란 종이를 가져와 관객들 머리 위로 말아 펼친다. 벤자민 패터슨의 《페이퍼 피스》의 시작이었다. 패터슨이 1960년 작성한 《페이퍼 피스》는 공연자들이 종이를 접고 찢고 구기고 문지르고 던지는 등 갖가지 액션을 하도록 지시하는 스코어이다. 《페스텀 플럭소럼 플럭서스》의 무대 위 막 뒤에서 종이를 구기고 찢는 소리가 들리면서 종이로 된 막에도 구멍이 하나 둘 생겨났다. 공연자들이 계속해서 갈갈이 찢은 종이 뭉치들을 관객석을 향해 던져 대면서 [사진 5]에서 보듯 막의 구멍이 점점 커지다가 무대에 종이 조각들이 흩뿌려진 채 끝이 나는 작품이다. 패터슨의 《페이퍼 피스》는 플럭서스 퍼포먼스 중 관객 참여를 직접 포함한 첫 시도로 평가 받는다.
[사진 6]
만프레드 레베, 《딕 히긴스의 ‘별자리 7번(1959)’을 지휘하고 있는 조지 마치우나스, 볼프 포스텔, 토마스 슈미트, 프랑크 트로우브리지, 벵트 아우프 클린트베르크, 아서 쾨프케, 다니엘 스포에리, 백남준》, 1963, 20.3×25.4cm, 1963, 흑백 사진
백남준은 《페스텀 플럭소럼 플럭서스》에서 공연자로도 여러 퍼포먼스에 참여했다. 딕 히긴스의 《별자리 7번》과 《그래피스 119번》도 그 중 하나다. 히긴스는 개별 소리 단위를 이벤트라 칭하고 이 이벤트들이 모여 성좌를 이룬다는 개념으로 《별자리》 시리즈를 기획하였다. 현이나 징, 벨, 관, 혹은 목소리로, 명확하게 구분되는 하나의 타악적 요소와 1초 이하의 울림이 있는 소리들을 복수의 공연자가 동시에 만들어내는 작곡이다. [사진 6]에서 《별자리 7번》을 지휘하는 사람은 조지 마치우나스이고, 왼쪽부터 볼프 포스텔, 토마스 슈미트, 프랭크 트로브리지, 벵트 아우프 클린트베르크, 아서 쾨프케, 다니엘 스포에리, 그리고 백남준이다.
[사진 7]
만프레드 레베, 《딕 히긴스의 ‘그래피스 119(1962)’를 퍼포먼스 중인 딕 히긴스, 프랑크 트로우브리지, 백남준, 요셉 보이스, 토마스 슈미트, 벵트 아우프 클린트베르크, 불프 포스텔, 앨리슨 놀즈, 다니엘 스포에리》, 1963, 20.3×25.4cm, 흑백 사진
《그래피스》 시리즈는 히긴스가 존 케이지에게 수학하던 1958년부터 시작하였는데, 연속적 사건으로 구성된 스크립트를 배우들이 철저하게 따라야 하는 당시 극 작업에 대해 반기를 들고 일종의 추상적인 극을 지향했다. 스코어는 인체의 움직임과 소리가 무대의 물질과 환경으로부터 마치 서예 패턴 같이 생성되도록 기보한 것이다. [사진 7]은 130개가 넘는 이 시리즈 중 119번으로, 무대를 가로질러 커다란 나무 블록을 몰고 지나간 후 히긴스를 선두로 프랭크 트로브리지, 백남준, 요셉 보이스, 토마스 슈미트, 아서 쾨프케, 볼프 포스텔, 조지 마치우나스, 앨리슨 놀즈, 다니엘 스포에리가 무대로 올라온다. 그리고 앞으로 몸을 기울인 채 바닥을 바라보며 히긴스가 스코어를 암송하는 것을 주의 깊게 듣는 퍼포먼스이다.
백남준은 조지 마치우나스의 《아드리아노 올리베티를 추모하며》 퍼포먼스에서도 모습을 보인다. 올리베티 계산기에 사용된 테이프를 스코어로 이용하는 작품인데, 이탈리아의 기술자인 아드리아노 올리베티는 전동식 계산기, 컴퓨터, 타자기 개발로 널리 알려진 기업가이다. 마치우나스의 스코어는 공연자들이 무작위로 선택된 올리베티 계산기 테이프에 자신에게 해당되는 숫자가 나올 때마다 그 숫자에 할당된 액션을 수행하는 것이다. 우산을 접었다 폈다 하기, 호루라기 불기, 앉아다 일어났다 하기, 고개 숙여 절하기, 거수경례 하기, 삿대질 하기 등이다. 이 공연에는 벵트 아우프 클린트베르크, 프랭크 트로브리지, 토마스 슈미트, 백남준, 볼프 포스텔, 에밋 윌리엄스, 아서 쾨프케, 다니엘 스포에리 등이 참여했다. [사진 8]의 왼쪽에서 두 번째 동그란 모자를 쓰고 있는 이가 백남준이다.
[사진 8]
만프레드 레베, 《뒤셀도르프 예술아카데미의 “페스텀 플럭소럼 플럭서스: 음악과 반음악, 기악 극장” 행사에서 조지 마치우나스의 ‘아드리아노 올리베티를 추모하며(1961)’ 공연 중》, 1963, 20.3×25.4cm, 흑백 사진
[사진 9]
만프레드 레베, 《뒤셀도르프 예술아카데미의 “페스텀 플럭소럼 플럭서스: 음악과 반음악, 기악 극장” 행사에서 백남준의 ‘젊은 패니스를 위한 교향곡’ 공연 중》, 1963, 20.3×25.4cm, 흑백 사진
무엇보다 백남준은 《페스텀 플럭소럼 플럭서스》에서 자신의 작품 중 매우 도발적인 두 개의 퍼포먼스를 무대에 올리게 된다. 먼저 《젊은 페니스를 위한 교향곡》이다. 백남준은 플럭서스 스코어라 할 수 있는 교향곡 시리즈를 작곡하였고, 「나의 교향곡들」(1973)이란 글에서 1번부터 5번까지 자신의 교향곡에 대해 설명하기도 했다. 1962년 쓴 《젊은 페니스를 위한 교향곡》이 1번으로 같은 해 『데콜라주』 2호에 발표되었고, 한 해 앞서 1961년에 작곡한 《20개의 방을 위한 교향곡》은 1963년 『플럭서스 선집』에 실린 관계로 백남준은 이를 2번으로 명명했다. 《젊은 페니스를 위한 교향곡》은 1984년에야 무대에서 실연될 수 있을 것이라고 백남준 스스로 스코어에 적어 놓을 만큼 도발적인 내용이다. 열 명의 젊은 남자들이 무대 전체를 가린 큰 종이 뒤에 서서 한 명씩 성기로 종이를 뚫어서 관객에게 내보이라는 스코어이다. [사진 9]는 《페스텀 플럭소럼 플럭서스》에서의 공연 모습이다. 벤자민 패터슨의 《페이퍼 피스》가 진행되며 관객석으로 종이들이 마구 던져지고 있을 즈음 무대 위에 다시 커다란 종이 막이 세워지고 그 뒤로 공연자들이 올라와 성기 대신 손가락으로 종이 막을 찢는 방식으로 백남준의 교향곡이 연주되었다. 이 작품이 스코어에 적힌 대로 실행된 것은 1976년 샌프란시스코 라 마멜에서 켄 프리드만의 기획으로 열린 프라이빗 이벤트, 그리고 1986년 쾰른 미술협회의 전시 《1960년대 예술 도시 쾰른: 해프닝에서 미술시장까지》에서였다. [사진 10]은 쾰른 공연이다.
[사진 10]
만프레드 레베, 《’젊은 패니스를 위한 교향곡'(퀼른 미술협회)》, 1986, 20.3×25.4cm, 컬러 사진
[사진 11] N090
만프레드 레베, 《백남준의 ‘플럭서스 챔피언 콘테스트’ 공연 중》, 1963, 20.3×25.4cm, 흑백 사진
《페스텀 플럭소럼 플럭서스》의 마지막을 장식한 백남준의 또 다른 작품은 《플럭서스 챔피언 콘테스트》이다. “참여자들이 무대 위에 놓인 커다란 양동이 주위에 모여서 전부 이 양동이에 오줌을 눈다 / 오줌을 눌 때 저마다 자신의 국가를 부른다 / 오줌이 멈출 때 노래도 멈춘다 / 마지막까지 노래하는 자가 최종 우승자가 된다.” [사진 11]은 다양한 국적의 남성 작가들이 양동이 주변을 에워싼 채 이 스코어를 실행하고 백남준은 옆에서 스톱워치를 들고 시간을 재는 모습이다. 이 공연에서 미국의 프랭크 트로브리지가 59.7초로 우승을 해 미국의 국가가 마지막까지 불리는 영광을 누렸다. 백남준은 같은 해 3월에 있었던 자신의 첫 개인전 《음악의 전시 – 전자 텔레비전》에 대해 쓴 ‘후주곡’이라는 글에서 자신의 TV 작업이 이 《플럭서스 챔피언 콘테스트》와 유사하다고 말한다. 그것이 자신의 인격체를 표현한 것이 아니라 단지 ‘물리적 음악’일 뿐이기 때문이라는 것이다. 백남준은 《젊은 페니스를 위한 교향곡》이나 《플럭서스 챔피언 콘테스트》처럼 금기로 여겨져 온 요소들을 가져와 정형화되고 규범화된 사회적 권위에 도전하면서 동시에 신체와 세계의 관계를 잇는 감각적 차원을 예술로써 새롭게 사유하는 길을 모색하였다.
[사진 12] N084
만프레드 레베, 《에밋 윌리엄스의 ‘앨리슨 놀즈를 위한 기도와 응답 2번’에 반주하는 딕 히긴스, “페스텀 플럭소럼 플럭서스, 음악과 반음악, 기악 극장” 행사 중》, 1963, 20.3×25.4cm, 흑백 사진
이러한 사진들은 인물 외에 배경에서도 흥미로운 점들을 발견할 수 있게 해준다. [사진 12]는 《페스텀 플럭소럼 플럭서스》에서 딕 히긴스가 《에밋 윌리엄스를 위한 기도 피아노곡》을 연주하고 있는 모습인데, 그 뒤로 벽에 세워져 있는 칠판에는 다음과 같이 써 있다. “신사숙녀 여러분! 이처럼 추운 날씨에 이처럼 많이 내림해주셔 우리 플럭서스 일동은 깊이깊이 감사하는 바입니다.” 백남준이 썼을 한글 환영사가 매우 단정한 필체로 적혀있다. 이 칠판에서 백남준의 인사말 부분을 쓱쓱 지워내고 해당 공연 제목인 “플럭서스 챔피언 콘테스트”라고 적어 놓은 걸 [사진 11]에서 볼 수 있다. 공연의 물리적인 환경과 진행 방식을 추측할 수 있는 대목이다. 더불어, 공연 내용의 급진적이고 자유분방함과는 반대되는 정중한 어조의 인사말을, 그것도 그 자리에 있던 대부분의 사람들은 해독하지 못했을 한글로 적어 놓은 백남준의 유머 섞인 기질 또한 느낄 수 있다.
지금까지 살펴본 사진들은 모두 만프레드 레베가 촬영한 것이다. “장 피에르 빌헬름의 갤러리를 자주 서성거리던 그 키 작은 젊은이가 지금은 독일연방정부의 노동부 국장이 되었다. 하지만 언더그라운드 시절의 그는 독일 아방가르드의 매우 예술적이고 독창적인, 그런 멋진 사진을 찍었다. 오늘날 그의 사진을 싣지 않고는 독일 예술에 관한 책을 출판할 수 없을 것이다. 정부 활동에서 조금이라도 개인 시간이 나면 그는 지금도 열심히 사진을 찍는다.” 백남준이 1986년 쓴 「보이스 복스」라는 글에서 레베에 대해 언급한 대목이다. 거침없던 예술가들의 시대, 그 곁을 자유롭게 맴돌던 이가 남긴 사진들은 구석구석 아직도 그 현장의 열기를 전하고 있다.
글쓴이 : 김성은
김성은은 미술관과 현대미술 이론, 문화인류학을 연구하는 기획자이다. 미디어 아트에 있어 사물과 신체의 작용, 지식 수행의 장으로서 미술관의 감각적 차원에 관심을 두고 연구하며 미술관 프로그램을 기획한다. 2011년부터 2014년까지 백남준아트센터에서 일했고, 현재는 리움에서 교육, 공공 프로그램을 맡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