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디오 코뮨: 예술가들이여 방송국을 점령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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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메라나 스마트폰으로 사진이나 동영상을 찍어 인터넷에 올리는 일이 이제는 일상이 되었다. 자기가 연주하는 동영상을 유튜브 또는 인터넷 동영상 공유 사이트에 올려 인기를 얻게 되면 역으로 기존 메이저 음반사가 접근해 와 공연에 참여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일이 흔해졌다. 1960년대 백남준을 비롯한 미디어를 사용했던 예술가들의 작업 속도와 기술의 발전 속도를 현재와 비교하면, 미디어 환경은 비약적으로 변화하였다.

그 당시 새로운 매체를 사용하여 작업했던 백남준을 비롯한 소수의 예술가들은 오늘날처럼 소프트웨어로 작업한 것이 아니었다. 기기를 이용하더라도 가격이 비쌌을 뿐만 아니라, 작가 자신이 하드웨어를 직접 제작해야 했고, 그 안에 담을 내용을 창안해 내는 수고를 해야만 했다. 이렇듯 어려운 과정을 거쳐 작품을 만들었지만 백남준은 자신이 이용하고 구축했던 새로운 매체를 혼자만 향유하지 않고 다른 예술가들이 접근할 수 있는 시스템을 구현하였다. 백남준은 관객 참여적인 퍼포먼스와 전시를 통해 현재 미디어 환경에서 구현하고 있는 사용자가 적극 개입된 개념들을 선보인다.

〈텔레비전 방에 있는 토마스 슈미트〉, 음악의 전시-전자 텔레비전, 1963 사진 만프레드 몬트베
▲ 〈텔레비전 방에 있는 토마스 슈미트〉, 음악의 전시-전자 텔레비전, 1963 사진 만프레드 몬트베

1963년 독일에서 <음악의 전시: 전자 텔레비전>으로 첫 개인전을 끝낸 백남준은 미국 이주를 결심한다. 전시 역사상 처음으로 13대의 전자텔레비전을 이용한 전시를 선보였음에도 불구하고 독일 사람들의 관심과 이목을 끌지 못했었기 때문이다. 당시 독일에서 텔레비전은 저녁에 몇 시간만 방송을 하는 상황이었다. 반면 1960년대 미국은 무엇이든지 새로운 시도가 가능한 사회적 분위기를 갖고 있었다. 미국에는 텔레비전 수상기가 가정마다 있었고 케이블 텔레비전방송국이 태동하려는 시기였기 때문에 다양한 컨텐츠도 필요하였다. 백남준은 미국에서 자신의 창작 의도를 실험할 수 있다고 보았던 것이다.

음악 작곡에서부터 시작하여 액션 뮤직을 통해 음악의 한계를 실험하던 백남준은 1963년 개인전을 통해 음악을 전시하고, 관람객의 참여를 요하는 새로운 예술 표현 방법을 선보인다. 백남준은 개인전을 준비하면서 예술에 있어 새로운 규칙을 창안하는 시도로 텔레비전, 선 수행을 위한 도구, 음향기기 등을 사용하여 조각도 그림도 아닌 ‘시간-예술’이란 새로운 장르를 선보인다. “음악에서 비결정성과 변동성이 중점 과제였던 반면 시각 예술에서 는 이 두 가지 요소가 매우 저 개발 된 새로운 매개 변수”가 될 수 있다고 백남준은 개인전을 마무리하는 글에서 밝혔다.

백남준은 개인전에서 못 다한 텔레비전 실험의 기술적인 문제를 해결하고 이를 위한 비용을 대기 위해 형님이 거주하던 일본으로 건너간다. 당시 중고 텔레비전 가격은 보통 사람의 4개월치 급여에 해당했고, 컬러 카메라 같은 경우 10년치 월급에 해당했다. 비디오 녹화기는 20만 달러가 넘는 천문학적인 돈이 필요한 상황이었다. 백남준은 형에게서 받은 백만엔을 도쿄에서 모두 소진해버렸다고 ‘나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의사, 아베’에 밝히고 있다.

발명가 우치다 히데오의 소개로 만난 슈아 아베와 함께 백남준은 흑백카메라 세 대로 각각 빨강, 파랑, 초록의 세 가지 이미지를 채널 TV의 동시 신호를 이용해 화면에 합성하는 실험과 함께 움직이는 로봇을 제작한다. 무선 조정기를 이용하여 걸어 다니면서 콩을 배설하는 로봇 K-456을 들고 미국으로 건너간 백남준은 제2회 아방가르드 페스티벌에서 로봇 오페라를 선보이며 주목을 받는다.

백남준의 절친한 친구이자 동료였던 마리 바우어마이스터는 당시 미국에 미리 정착하여 뉴욕 업타운 갤러리인 보니노 화랑에서 백남준이 개인전을 열 수 있도록 주선해준다. 1965년은 여러 가지로 백남준에게 의미 있는 해였다. 소니에서 처음 나온 휴대 가능한 비디오카메라를 650달러를 주고 구입하자마자 비디오 영상을 촬영한 일과 보니노 화랑에서 가진 개인전이 있었기 때문이다.

〈창조적 매체로서 TV〉, 하워드 갤러리 전시 리플렛 이미지, 1969
〈창조적 매체로서 TV〉, 하워드 갤러리 전시 리플렛 이미지, 1969

백남준은 텔레비전을 변조한 작품과, 비디오 작품을 선보이며, 뉴욕 예술계의 관심을 받게 된다. 백남준은 곧이어 키네틱 아트에서 비디오 예술을 선보이기 시작한 하워드 와이즈 갤러리에서 ‘창조적 매체로서 TV(TV as a Creative Medium)’라는 제목아래 샬롯 무어만과 함께 ‘살아있는 조각을 위한 TV브라’를 선보인다. 이를 눈여겨 본 보스턴 WGBH 방송국 관계자는 백남준과 당시 함께 전시했던 작가들과 함께 미국 역사상 예술가에 의해 만들어진 첫 방송 프로그램인 ‘매체는 매체다(Medium is Medium)’를 1969년 선보인다. 이 프로그램 제작에 앨런 카프로, 제임스 시라이트, 탐 테드록, 오토 피네, 알도 탬벨리니, 백남준이 참여하였다. 이 여섯 명의 작가들이 만든 작품을 순차적으로 보는 30분짜리 프로그램이었다. 백남준은 조작된 텔레비전을 스튜디오 안으로 가져와 카메라 세 대의 라이브 촬영을 일그러지게 한 화면이 가득한 〈전자 오페라 No.1〉을 선보인다.

백남준, 〈비디오 오페라 No.1〉, 1969
백남준, 〈비디오 오페라 No.1〉, 1969

유럽에서는 게리 슘이 1968년 ‘텔레비전 갤러리’라는 타이틀 아래 대지 예술가들이 제작한 영상 작품을 독일 방송에서 처음으로 선보였으나, 본격적으로 비디오 매체를 다루는 작가들이 방송국과 작업한 것은 백남준 등 여섯 명이 처음이었다. 당시 제작에 관여 했던 프레드 바직은 처음으로 예술가들에게 TV에 대한 통제력을 준 사건이었다고 회고한다. WGBH 방송국은 미국공공방송 네트워크의 일환으로 1960년대 중반부터 실험적인 방송을 제작해 왔고, ‘매체는 매체다’의 방송 성공으로 예술가들이 방송국에서 레지던시를 하는 프로그램 비용을 록팰러 재단으로부터 지원받게 된다. 백남준 이외에도, 스탠 벤더비크, 로스 배런과 해리스 배런, 리처드 쉐크너 등이 첫 수혜자가 되었다. 백남준은 WGBH 방송국 레지던스 프로그램을 통해 방송국 기기에 접근하여 다양한 비디오 표현 방식을 배울 수 있었다. 그러나 그가 원하는 영상 실험을 위해서 드는 스튜디오 기기 사용 비용이 엄청나 록팰러 재단으로부터 받은 기금으로는 턱없이 부족했다. 무엇인가 새로운 기기를 만들 필요성이 자연스럽게 대두된다.

백남준, 〈백/아베 비디오 신시사이저〉, 1969/1972
백남준, 〈백/아베 비디오 신시사이저〉, 1969/1972

백남준은 록팰러 재단으로부터 1만불을 지원 받아 일본으로 건너가 슈아 아베와 함께 비디오 신시사이저를 만든다. 백남준에 앞서 에릭 시걸이 흑백 신호를 빨강, 녹색, 청색으로 변환하는 시도를 한 비디오 신시사이저를 제작하였다. 하지만 방송용으로 제작된 것은 아니었기 때문에 일정한 한계를 지니고 있기도 했다. 백남준이 원했던 비디오 신시사이저는 원형이나 지그재그 같은 다양한 주사 방식, 비디오 피드백, 오디오 신호 혼합, 카메라를 이용한 재주사 방식이 가능한 것이었다. 백남준의 백/아베 비디오 신시사이저는 방송으로 나갈 수 있도록 미국연방통신위원회의 규범을 따라야 했다.

백남준,〈비디오 코뮌〉의 스틸 이미지, 1970
백남준,〈비디오 코뮌〉의 스틸 이미지, 1970

백/아베 비디오 신시사이저를 활용한 첫 방송용 작품은 ‘비디오 코뮌’으로 WGBH 방송국에서 제작된 4시간짜리 생방송 프로그램이었다. 비틀즈의 음악을 프로그램 내내 틀어주는 일종의 음악방송이었다. 백남준은 비디오 합성 이미지와 더불어, 일본 상업 방송을 자막 없이 미국인을 대상으로 하는 방송에 그대로 내보내는 등 파격적인 시도를 하였다. 그러나 백/아베 비디오 신시사이저는 너무나 유기적이어서 어떤 이미지를 반복할 수 없는데다, 색채를 영상에 과도하게 입히게 되면 트랜스미터 장비가 과열되어 파손되었기 때문에 방송국 기술자들의 기피 대상이 되었다. 그러나 많은 예술가들이 WGBH 방송국에서 백/아베 비디오 신시사이저를 이용하였다.

백남준은 이후 캘리포니아 예술대학과 뉴욕 WNET 방송국의 의뢰를 받아 신시사이저를 추가로 제작 하였다. 백남준은 백/아베 비디오 신시사이저를 통해 관람객의 참여를 이끌어낼 수 있는 개방형 전자 환경을 만들기를 원했고, 그들이 제작한 신시사이저는 일종의 개방형 시스템으로 쌍방향 비디오게임의 원형이라고 ‘나에게는 세상에서 가장 위대한 의사, 아베’에서 밝히고 있다.

보스턴 WGBH 방송국과의 레지던시가 끝나자 백남준은 록팰러 재단의 하워드 클라인 디렉터에게 보스턴 방송국과 같은 프로그램이 뉴욕에도 생길 수 있도록 지원해 달라고 설득하여 뉴욕 WNET 방송국에도 예술가를 위한 워크샵이 탄생하게 되었다. WGBH 방송국 관계자들은 백남준을 회고하면서 그는 자신의 임무가 더 많은 예술가들이 아주 저렴한 비용으로 비디오 매체를 사용하게 되는 것이라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백남준의 비디오 작품 제목 ‘비디오 코뮌’처럼 그는 일종의 공동 커뮤니티를 구현하고 싶어 했다.

백남준은 ‘글로벌 그루브와 비디오 공동시장’이라는 그의 글에서 세계 평화와 지구 환경을 위해 누구나 소통이 가능한 음악과 춤이 중심이 되는 공영 텔레비전의 프로그램과 유럽공동시장 모델을 따라 비디오 공동시장을 형성하여 비디오 정보 유통을 활성화 시켜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는 일원화된 상업 방송의 대안으로 이를 제시하며 이런 대안적인 프로그램이 미칠 교육적 효과는 무시 할 수 없는 것이라고 주장한다.

백남준 당대에 실현되지 못했었지만 인터넷의 발달과 유튜브 등 다양한 플랫폼의 발전으로 그의 꿈은 실현되고 있다. 우리는 이제 트위터, 팟 캐스트 등 정규 방송 이외에도 다양한 목소리를 담은 대안적인 매체들을 통해 의견을 수렴하고 교환 하면서, 중동의 재스민 혁명처럼 사회 곳곳에서 변혁을 일으키고 있다. 백남준이 위성 방송 프로젝트를 통해 고급문화와 하위문화를 뒤섞고, 방송국에 예술가들을 참여시키는 프로그램을 만드는데 일조 했던 것은 더 많은 사람들과 폭넓게 소통하면 인간 행동을 변화 시킬 수 있다고 굳게 믿었기 때문이었다.

백남준은 1995년 첫 광주비엔날레를 기획하면서, “1995-2015년 사이의 비디오 예술은 ‘비디오 예술/비디오 삶’의 쌍방향 소통을 이룩함으로써 스스로를 능가할 것” 라고 선언하였다.

백남준은 일원화된 문화가 아닌 다양한 층위를 가진 문화들이 서로 만나고 교차하며 서로를 받아들이는 가능성을 믿었다. 그런 의미에서 우리는 아직도 백남준 실험의 현재 진행형 속에 있다.

이유진(백남준아트센터 큐레이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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